윤약국 근황

당장 내 아버지부터의 일이다. 가끔 아버지집에 들려 살펴보노라면 어떤 약은 진작에 복용하여 없어졌고, 어떤 약은 남아돌고 있다. 너무 많은 약봉지들이 약장을 가득 채우고 있기에, 가끔씩 아내가 집에 들려 정리를 해드리곤 했다.

그러다가 장기 처방 환자들이 어떻게하면, 헷갈려하지 않고 약을 복용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다가 크리넥스처럼 약을 하나씩 뽑아 먹으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행이도 pill box라는 개념으로 영미권 국가들은 약봉지 롤을 박스에 담아서 꺼내어 먹게하는 서비스가 있었고, 이 모형을 중심으로 윤약국에서는 디자인부터 제작까지 전 과정에 관여하였다.

가상의 이름으로 조제한 예제입니다.

한달 이상 장기 처방을 받는 복용자를 대상으로 제공하기로 했다. 이따금씩 약 복용중 약을 잃어버리거나, 혹은 홀로 약을 복용 못하는 노인들이 주 대상이다. 요양보호사들의 얘기에 따르면, 노인들은 약봉지를 순차적으로 끊어 먹지 않아, 약 뭉치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결국은 약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데스크나 식탁에 올려 놓고, 순차적으로 곽티슈에서 휴지를 뽑듯, 약봉지도 그렇게 하나씩 끊어서 복용하면 된다.

문제는 일반 봉투 제작비에 몇곱절하는 비용과, 또 새로운 서비스인지라, 소비자인 약 복용자들에게 사용법에 대해서 일일이 설명해줘야 하는 점. 그리고 분실 우려가 적은 단기처방(감기류) 환자들이 역차별을 주장하며, 고작 9봉지 밖에 안되는 약에도 약박스를 제공해달라는 웃지 못할 이기심 정도가 이겨내야할 숙제이기도 하다.

다시한번 알세기에 도전하다.

현재 윤약국에서 도입해서 사용하고 있는 계수기이다. 처음 약사가 일일이 손으로 약을 셈을 했다. 이러한 단순 작업에 예민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그 해결책으로 도입한 제픔이 커비사의 KL1이라는 제품이다. 하지만 국내 판매 가격이 800만원이 넘는것으로 알고 있다.

우선 새로운 기술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다. 그 동경에는 새로운 기술은 현재 구현되고 있는 기술들을 획기적으로 적은 비용으로 더 나은 결과를 내야한다는 당위적 명분을 함께 수반한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내가 접근가능한 기술들에 대해서 조합해보기로 했다.

우선 커비사의 KL1의 단점은 초당 15개의 알약을 셀 수있다는 것이다. 얼핏보면 엄청 빠르다 싶지만, 알약이 작은 경우 카운팅을 위해 알약을 털어 넣을때, 순간에 20알 이상이 투입되기도 한다. 말했다시피 초당 15알이 훌쩍 넘은 분량이 들어가면, 에러 메세지를 띄우고 카운팅이 멈춰 버린다.

흑백논리가 때론 도움이 된다

알약 형태의 레이아웃을 가장 뚜렷히 잡아낼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다가, 역광을 떠올렸다. 예시가 된 노란색 알약이 단순히 흑백으로 변환하는것보다 역광을 통해 흑백으로 나누는것이 더 명확한 방법이라 생각을 했다.

오래전 옛날 필름의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형광등이 들어간 작은 박스위에 필름을 올려놓고 확인하는것을 사지관에서 본적이 있다. 비슷한 원리를 생각하고 제품을 검색하니 LED로 같은 기능을 구현한 제품들이 있다는것을 알게 되었다. 밝은 불빛 위에 알약을 올려놓고 사진을 찍으면, 마치 역광사진을 찍어 인물 사진이 까맣게 나오는 그런 효과를 얻을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다. LED 불빛이 더 강해야만 했다.

얻은 결과는 이러했다. 그러면 도대체 이걸 가지고 뭘 할것인가?라는 질문이 나올수 밖에 없다. 결과는 바로 다음과 같다.

총 536개의 알약이 카운팅된것이다. 지금 사용한 기술은 에스파뇰의 Vision Learning 개발회사의 제품이다. 사실 금번 테스트의 경우 아주 완벽한 결과였지만, 여러 약들을 테스트해봤을때는 일정량의 에러가 포착되었다. 그 예시는 다음과 같다.

완벽한 알약 카운팅을 위해, 국내 해당 기술에 조예가 깊은 클리앙 회원님을 찾아뵙기로 했다. 윤약국에서 감당할만한 개발비라면, 기꺼이 개발하여, 개인약국의 약사님들에게는 무료로 배포할 생각이 있다. 반면 일정 수준에서 판매를 하여, 다른 프로젝트를 위한 시드 머니로 활용하라는 아내 주변 약사님들의 조언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 후에 벌어질 일에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가루 빻는 장인

셔터맨 졸업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초창기 아내 옆에 꼭 붙어 있으라던 병원 원장이, 근래 들어 나에게 이제 내 일 하러 안가냐고 묻는다. 이쯤하면 아내 혼자로도 약국 운영에 문제가 없지 않냐는 말이었다.

약국에 소아 환자들이 이따금씩 온다. 또 하루에 5건에서 많게는 10개 정도이다.  소아환자라 지칭하는 것은 가루약 조제가 수반되는것을 의미한다. 약사는 이따금씩 가루약 처방이 약국에 들어오면, 곤란한 표정을 노출할때가 있었다. 가루약 조제가 불편한것도 있지만, 그보다 가루약 조제로 인해 다른 처방전 환자들의 약 조제에 병목현상이 생기는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처음 약국에 도입한 제품은 파우더크러쉬라는 캐나다 제품이었다. 이 제품을 아내가 자주 쓰지는 않았다. 이 제품은 주로 성인산제(성인중 알약 먹는것을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를 만들때 사용하곤 했다. 약자판기에서 뽑아낸 파우치 자체를 하나씩 빻아서 제공할때 사용하는데, 이때 캡슐은 빻아지지 않고 그냥 캡슐이 터져서 부서진다. 약사는 성인산제 제공시, 캡슐 껍질은 빼고 드시라고 설명하고 제공하였다. 성인들의 경우 목넘김이 어렵기에 아주 곱게 빻아서 제공할 필요까지는 없다 했다. 하지만 성인중 가루산제로 부탁하는 경우는 한달에 두세번 정도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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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루약은 대부분 소아환자들의 주문이었고, 이러한 소아환자 의사처방은 100% 블렌더를 이용해서 갈아서 제공한다. 약국용이라고 써있지만, 아무리 봐도, 일반 분쇄기와 별반차이가 없어보인다. 나중에 경험적으로 알게된것은 정말이지 우리네 주방에서 쓰는 분쇄기와 동일하다. 아내가 이제품을 쓰는 이유는 많은 양의 알약을 한번에 분쇄할수 있기 때문이다.  파우더 크러시를 이용할 경우 한번에 3-4일치의 소아약을 빻는데는 시간이 제법 걸린다. 또 전용 용기에 넣고, 두손을 모두 이용해야 하는 조작방법이, 복잡한 약국에 적합하지 않으며, 오히려 더 오랜 작업시간이 걸리기에 약사는 파우더 크러쉬 사용을 거의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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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퍼왔습니다

소아환자의 엄마들 중 상당히 까다로운 사람들이 있긴하다. 얼마전 약국에 방문한 소아과 환자의 어머니가(이하 소아맘)  약사에게, 자신이 보는 앞에서 가루약 조제를 요구하였다고 한다. 자신의 아이는 소중하기에, 여러명이 같이 쓰는 믹서기에 갈지 말라는 이유였다.  다행이도 우리는 파우더 크러쉬가 있었기에,  보는 앞에서 알약을 분쇄하는 것을 직접 목격시켜줬다고 한다. 대신 다른 처방전 환자들의 대기시간이 곱절로 늘어났다고 한다. 다시 말하지만, 약국의 조제환경은 잘 정리정돈되어있는 가정집의 주방보다 훨씬 더 위생적이고 깨끗하다. 또한 믹서기처럼 생긴 분쇄기 역시 훨씬더 위생적으로 관리되고 있다. 소아맘이 오해하고 있는 것은, 전용 용기에 담아서 분쇄하는것만이 위생적이라는 착각이다.

아내의 얘기를 듣고, 가루약 조제에 대해서 고민을 더 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약국에서 아내가 가루약 조제를 하는 전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내가 느낀점을 정리해보았다.

  1. 가루약 조제로 인해 병목 현상이 생기기에, 블랜더를 이용할수 밖에 없다.
  2. 블랜더를 이용할때 문제점은 약의 오염보다, 분쇄후 발생하는 미세 먼지가 약사의 건강에 해를 끼친다.
  3. 약을 가는 5-10초 정도는 블랜더 앞에 붙어 있어야 한다.
  4. 많게는 10개 정도의 약을 한번에 분쇄한다.

대안점을 찾기 위해 또 다시 검색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가능성 있는 후보군을 3개로 추렸다.

우선 묵직해보이는 Safe Crush라는 회사의 제품이다.  이 회사와 지금까지도 긴밀히 연락하고 있다.  상업적 목적의 제품이다. 단점으로는 약을 분쇄하는데 대략 40초 정도 소요된다는 점과, 타이레놀 5개 정도를 한번에 빻을정도이다.개선된 버젼은 25초 소요된다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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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는 세련되 보이는 Severo사의 제품이다. 이 제품은 대략 7초 정도에 알약을 분쇄해준다. 처음에 이 제품을 구매하기 위해 주문을 넣었다. Safe Crush사의 담당자에게 우리 약국에서 가루약 조제하는 영상을 보내준적이 있는데, 무척 놀라는 눈치였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파악하고 있는 Severo의 제품은 2-3알이 맥심이라고 설명하였다. 당연한것이 서양권에서 가루약 분쇄기는 성인산제용이며, 한번 복용할 분량만큼만 분쇄를 하게끔 디자인되어 있다. 하긴 설명을 들어보니, 이들의 제품이 분쇄용량이 왜이리 작을까 의구심이 들었는데 이해가 되었다. Severo사에 구매의사를 취소를 하였고, 그들은 조만간 한국을 비록한 아시아 마켓에 도전하려하는데, 왜 취소를 하는지에 대해 물었다. 약국에서 가루약 분쇄하는 과정의 비디오클립을 보내줬다. 이것을 본 뒤로 바로 취소 처리를 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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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SafeCrush사의 관계자는 First Crush라는 제품이 그나마, 현재 한국의 환경에서 쓸만하겠다고 추천을 해줬다. 하지만 한국의 분쇄량을 보건데, 두대 이상을 도입하라는 조언도 곁들였다.  그러면서 조만간 한국시장에 만나보자는 약속을 남겼다.

 

First Crush 두대를 구매하다.  모니터로본 제품은 상당히 못생겼다. 그래도 기능만 좋으면 되겠지 생각을 했다. 막상 받아놓고 보니, 생각보다는 제법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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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용컵이다. 음각으로  표시된 용기에 분량의 알약을 넣고, 양각으로 표시된 용기는 뚜껑에 해당된다. 이 뚜껑을 포개어덮고 분쇄기에 넣고 버튼을 누르면 된다. 문제는 이 제품이 어느정도의 성능을 발휘할것인가였다.

실제로 처방받은 아이의 5일치 분량이다.  처음 용기에 담겨진 알약 수를 보면서, 과연 이게 잘 갈릴까 의구심이 들었다. 7초가 지난후에 꺼내보았을때, 완벽히 갈려서 나오지 않은것을 알 수 있었다.

다시 넣고 추가 분쇄 버튼을 눌렀다. 이후 완벽하게 고운 가루로 분쇄되었다. 그렇다면 손안대고 대략 15초면 원하는 수준의 결과물을 얻을수 있게 되는 셈이다. 이 찰라에 약사는 시럽을 덜거나, 다른 업무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소아과 전문 약국은 대부분 가루약이기에, 우리약국처럼 ATC(약자판기)를 도입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반면 내과에서도 소아과 만큼은 아니지만, 꽤 많은 수의 소아환자를 진찰한다. 어지간한 내과라면 ATC를 대부분 도입했다고한다.  한가지 바라는게 있다면 ATC를 이용한 조제 보조 기능이 있었으면 좋겠다.  가령 분량의 소아산제 처방의 알약들을 한봉지에 담아서 배출해주는 기능이 있다면 봉지를 뜯어서, 분쇄기에 넣으면 조제실수가 줄어들지 않을까 싶다. 가끔씩, 총량이 정수로 떨어지지 않고, 0.5 단위로 처방될때가 있다. 이러한 변수들에 대한 고민을 더하면, 멋진 가루약 보조기술로 ATC를 활용할 수 있지않을까?